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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모든 게 사랑이었어

고통과 슬픔, 환희도 사랑이었다. 만남과 이별은 시작과 끝이 속절없는 반복이 되고 상처의 흔적이 물안개처럼 앞을 가려도 사랑이 없었다면 허공에 그리는 그림이다. 그대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순간은 기적이었다. 사랑이 없었다면 꽃잎에 맺히는 새벽 이슬과 스쳐가는 바람에 서로를 묶지 않았을 것을.   가랑비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허우적거리며 구멍이 송송 난 가슴을 쓰다듬는다. 사랑으로 총 맞은 흔적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수시로 아프다.   내 꿈은 여류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백목련’으로 수상했는데 심사를 맡은 김춘수 시인이 대구에서 노천명 같은 시인이 될 거라고 칭찬하셨다. 시인이 못 됐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일생동안 자음과 모음을 가슴에 품고 살게 했다. 길을 잃고 흔들릴 때, 한국 방문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사랑으로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믿음은 어떤 고난과 불행도 견디게 한다. 사랑은 신통력을 가진 주술처럼 심장을 뛰게 하고 자유로운 영혼 되어 성냥개비 하나로 우주를 불태운다.   운명의 물줄기는 여러 가닥으로 흐른다. 대학시절 미 문화원 원장 부인의 한국어 교사로 일 하다가 미국 독립기념파티에서 미 육군 보급사령관을 만나 결혼하고 도미했다. 너무나 엄청난,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보수적인 지역 문인들의 마른 안주로 입방아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주변문학’ 동인 활동을 함께 하던 동지가 내가 결혼할 즈음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가난한 작가의 사랑을 배신하고 부귀와 영화를 위해 백마 탄 남자’를 선택한 시나리오로 둔갑했다.     연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는 사랑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과 배신자가 등장한다. 작가 지망생의 뼈를 수장하는 문우들의 슬픔을 담은 중편소설 ‘전리’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진출한 작가는 훗날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된다. 기억조차 흐릿한 먼 옛날의 추억은 아득하고 멀지만 사랑은 밤하늘의 별처럼 지상으로 내려와 반짝인다.   결혼 후 첫번째 고국여행 때다. 문단의 반항아로 찍힌 나를 측은하게(?) 여긴 선배 시인이 오늘의 작가상을 탄 신예작가 술잔치에 날 데려갔다. 순식간에 인기 문인 반열에 오른 작가가 ‘남편을 사랑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난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위장된 정답이고 아니라면 부귀영화에 침몰한 여자가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지옥에서도 나를 구출해 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남편이라면 사랑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대답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은 작가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다.   모국어는 내 존재의 증명서다. 천국과 지옥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패스포트다. 지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 살아야 하는 지는 여태 미지수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단지 잊히지 않는 작은 눈짓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랑에는 인센티브(Insentive)가 없다. 성과나 실적에 따라 보상받지 않는다. 사랑은 받은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유통기간의 제한 없는 조건 없는 선물이다.   사랑은 무언의 자작극이다. 흉내 낼 수 없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분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비통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별들의 아픔을 새기는 광대의 무언극이다. 사랑은 각본 없이 가면 쓰고 목숨 걸고 줄타기 하는 꼭두각시 탈춤이다.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막이 내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랑 이야기 국민적 사랑 김춘수 시인

202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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